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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해요

유엔난민기구 - 심은아



‘난민’이란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처럼 자신의 국가를 떠나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와서 보호를 받고자 난민 신청을 한다. 
그러면 유엔 난민기구는 그들과 장시간 인터뷰하면서 판결문을 작성하고 난민 인정 여부를 판정받기 위해 판결문을 법무관에게 제출한다. 
심은아 씨는 제출된 판결문을 보고 난민으로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는 심사를 하고 있다.

심은아 씨가 어떻게 유엔기구에서 활동하게 되었는지, 유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잠시 남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심은아 씨가 유엔난민기구 소속으로 일한 지 6년, 거의 1년에 한 번씩 나라를 옮겨 다니고 있다. 
그 이유는 법적 구호와 난민 심사에 관련된 사항을 여러 정부기관 관료들에게 교육시키는 일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난민조약을 채택하지 않은 나라에 유엔난민기구가 들어가 임시로 일을 해주면서 교육을 병행해 그 나라 정부 기관 스스로가 난민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국제법상 여러 나라가 난민에 대해 합의하고 있는 단계지만 설사 난민을 수용하지 않는 나라가 있어도 제재할 방법이 없어요. 
그렇지만 최소한 꼭 지켜야 하는 상호간의 약속은 있어요. 
그것이 국제관습법(International customary law, 국가 간의 묵시적인 합의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관행)이고 그중에 하나가 농르플망 원칙(nonrefoulementprinciple, 강제송환 금지 규정)이에요. 
정치, 인종, 종교, 국적 등 이유를 막론하고 고국을 떠나 망명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 돌아갔을 때 핍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억지로 보내지 않는다는 약속이에요.”
받아들이기에 불편한 정치적 이유가 있거나 국가이익에 상반되는 난민이라도 국제관습법에 의해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국가 간의 약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나라가 있다면 유엔난민기구가 여러 국가와 회의를 통해서 난민을 제3국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어요. 
내일 당장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도 난민이 될지 모르죠. 
어쩔 수 없이 우리도 다른 나라에 가서 잠시만 여기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할지 몰라요. 
물론 평생 살 것은 아니에요. 
우리나라가 괜찮아질 때까지만 여기 있게 해달라는 사람들이 난민이에요. 
우리랑 똑같은 인간이고, 잠시 남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에요.”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대안학교에

심은아 씨는 어릴 적 낯을 많이 가렸고 학교에서는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는 평범한 아이였다. 
좋은 성적을 강요하지 않았던 부모님은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분이었고, 그녀가 가고 싶다고 졸랐던 미술학원에 보내준 것이 사교육의 전부였다.

유학을 떠났던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이메일이 없던 시절, 편지를 쓰면 열흘이 넘게 걸려 도착했지만 부모님은 항상 편지에 좋은 말씀을 써서 답장을 보내주셨다.

“열일곱 살에 귀국하여 제가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TV에서 간디학교 다큐멘터리를 보고 딸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에 저를 데리고 견학을 가셨어요.”

부모님은 학업 성취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녀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기에 대안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입학을 위해서는 간단한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그중 하나,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친구들끼리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겠느냐’라는 문제였다. 
자신만의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었다.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만들어가는 교육 과정

“대안학교였지만 인가받은 학교였기 때문에 싫어도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 있었어요. 
일반 학교처럼 문제집 푸는 수업은 따라가지도 못하겠고 재미도 없었어요. 
한국의 역사나 사회, 한국의 풍습, 전통음악 등은 재미있었지만 칠판에 빽빽이 쓰는 내용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럴 때면 선생님께 제대로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선생님 입장에서 보면 힘든 학생이었어요. 
그러다가 교장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이 시간에 다른 것을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죠. 
교장선생님이 수업에 빠지려면 스스로 시간표를 잘 짜서 제안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어요.”

심은아 씨는 대안학교 중학생 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시간을 만들어서 제안서에 넣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체수업’은 학교 과정으로 자리를 잡아, 다른 학생들도 대체수업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학생들을 위해 동아리를 만들어서 역사 답사를 다니고, 동네잔치에서 풍물로 어르신들을 기쁘게 하는 행사도 가졌다. 
선생님들이 다니던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기도 하면서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교육 과정을 만들어나갔다. 
그녀는 대안학교에서 자유롭게 놀면서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쓸 수 있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주어진 교육 과정 대신 스스로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계획을 세워야 하고 누군가를 설득해서 허락을 받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학교에서 매주 있었던 초청 강연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왔다. 
상남도 산청이라는 시골에 있는 학교였지만 학교 밖에는 커다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강연들이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활동하시는 한국 분들이나 외국인들도 왔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통역을 맡았다.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에서 외국인들 대상으로 한국 체험을 하는 캠프를 했는데 한국위원회 분이 저에게 통역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방학 때 학교에 남아 통역을 하면서 어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 인연으로 한국위원회 분이 저한테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더 큰 곳으로 나가 한국의 위상을 알려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죠. 
그때는 장난치며 웃어 넘겼지만 그분을 통해 많은 기회를 얻었어요.”

유네스코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서울에서 열릴 때면 잊지 않고 연락을 주셔서 참여하게 해주셨다. 
그녀는 그런 행사들을 통해 한국문화를 외국인에게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 익숙해졌고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면서 국제적인 감각도 키울 수 있었다.

1년 동안 배낭여행에서 만난 난민들

수시로 대학에 합격했지만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심은아씨는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배낭여행을 떠났다.

“1년 동안 배낭여행을 하면서 중국, 러시아, 북경 등을 돌아다니면서 탈북자뿐만 아니라 네팔에 있는 소수민족, 중국의 티베트족 등 많은 난민들을 만났어요.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이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네팔, 중국, 티베트를 여행하면서 네팔 고아원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티베트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난민들의 혹독한 현실도 목격했다. 
중국에서 조선자치구에서는 조선족의 현실을 보았고 탈북자들도 만났다.
그런 경험을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느끼는 편안함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왜 이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인간인데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할까? 내가 누리는 이 혜택은 뭐지?’하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수시를 합격한 상태였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었던 그녀는 민간단체에 연락을 해서 ‘나는 고등학생으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민간단체에서 하는 일을 배우고 싶다,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설득했다. 
이후 그녀는 시간표를 짜서 7~10개의 단체에서 요일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난민들의 피난처’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난민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다

“이주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산업재해를 당해도 치료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때 고용주와 이주민 사이에서 제가 통역을 하게 되었는데 이주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온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 국적,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서 온 사람들도 많다는 것, 이들이 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우리나라는 난민조약을 체결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법 시행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심은아 씨는 다른 국가에서는 어떻게 난민법을 도입하고 실행하는지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법에 대해 몰랐던 그녀도 법문서를 뒤져가며 난민들이 난민 신청을 하는 데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았다.

“저희 단체를 통해 제1호 난민으로 인정받은 분이 생기자 이라크, 미얀마, 방글라데시 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죠. 
그런 분들을 돕기 위해 한국어 교실, 영어 교실, 직업 알선 등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탈북자 문제도 야학으로 운영하는 대안학교를 만들어서 그분들이 한국사회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활동을 했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난민단체였던 ‘피난처’에서 난민들을 위해 동분서주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난민법을 배우러 법무부 고위직 공무원들이 ‘피난처’를 찾아왔다. 
모르는 게 있으면 같이 나눠서 배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열의를 가지고 강의를 했는데 돌아온 반응은 따가운 지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고졸에,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없는 여자아이를 전문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공무원들은 그녀의 말을 미더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죠. 
‘최고를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발동하더라고요. 
사회가 원하는 자격증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난민이라는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 해도 현실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법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공부를 가르쳐주는 곳이 없었기에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어요.”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

심은아 씨는 영국 소아스 대학에서 개발학과와 사회인류학을 복수전공하면서 유럽을 제외한 각 대륙이 어떻게 경제적·정치적으로 개발되었는지 공부했다.
또 동북아지역의 강제이주, 난민문제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주’에 관한 여러 분야를 공부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그녀는 영국 난민 NGO 단체에서 혼자 온 아동 난민,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활동하고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온 아이들의 사회 적응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영어를 모르는 아이들과 손짓 발짓 하면서 프로그램을 함께 개발하는 동안 그녀는 영국의 대학교 연합 난민 동아리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다른 NGO에서 영국으로 탈북한 사람들을 위한 한국통역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은 그녀는 그 단체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단체는 난민 신청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사회복지 과정까지 도와주는 단체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유엔난민기구 말레이시아에 인턴십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원래는 대학원생부터 그곳에서 일할 수 있었는데, 저는 난민 인정 절차뿐 아니라 여러 시스템을 경험해 보았으니 일하게 해달라고 설득을 했어요.”

그녀는 방학 때마다 말레이시아에서 인턴십을 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인정받아 인턴 자격으로는 하기 힘든 여러 프로젝트에 동참할 수 있었고 유엔난민기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럴수록 그녀는 난민법에 대해 더 확실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석사 과정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석사 과정을 옥스퍼드 대학원으로 정한 것은 명성 때문이 아니에요.
1982년, 세계 최초로 난민학과를 만든 학교인 데다가 그곳 교수님들은 ‘난민법의 신’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요. 
그런 교수님 밑에서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녀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무엇이든 궁금하면 확실히 알 때까지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골치 아픈 성격’이라고 했다. 
그녀는 대학교를 다닐 때도 방송국 통역 일을 하고 대학교 내 편의점 일도 하면서 학비를 보태 겨우겨우 졸업을 했는데, 옥스퍼드 대학원은 수업료가 비싸기로 유명한지라 부모님 앞에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원에 지원해서 합격을 하긴 했는데 학비가 너무 비싸서 포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라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어요. 
그때 어머니가 ‘포기란 단어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면서, 지금까지도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떻게든 대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대신 시집 갈 때는 스스로 돈 벌어서 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죠.”

1년 과정인 대학원에서 그녀는 국제 난민법, 국제 인권법, 국제 인도주의법과 기타 다른 국가들의 난민법에 대한 법률을 배우며 그 당시 인권단체들의 인도주의적인 구호활동들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다.
대학생일 때 인턴십을 했던 말레이시아 사무실 부장님은 그녀에게 공부를 마치면 다시 오라고 하셨지만 그녀는 그런 식의 입사는 불편했고 더군다나 JPO(Junior Professional Officer, 국제기구 초급전문가, 장래 정규 국제공무원을 희망하는 젊은 층을 위하여 일정 기간 유엔개발계획(UNDP), 유엔공업개발기구(UNIDO),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세계보건기구(WHO) 등의 국제기구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도록 함으로써 전문지식과 국제적 업무의 체험을 축적하는 실무연수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제도에 근거하여 채용되는 자) 시험을 보기도 싫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가 석사 과정에서 쓴 논문이나 에세이 등이 제네바 본부에 알려져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는 유엔난민기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난민들을 돕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는 강했다.

“난민 심사를 하는 것은 국가만 부여할 수 있는 법적 지위예요. 
시민권이나 비자처럼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죠. 저는 한 국가에서 일하는 것보다 전 세계적으로 난민들을 보호하는 일을 좀더 체계적으로 하고 싶었어요. 
유엔난민기구만이 국가를 대신해 난민들에게 법적 지위를 줄 수 있어요. 
유엔난민기구를 선택해서 온 이유는 유엔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유엔난민기구에서 일한다는 것

유엔기구 혹은 국제 환경단체 등에서 근무하거나 개인적으로라도 난민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심은아 씨가 전하는 말이 있다.

“미래의 목표가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묻기보다는 내가 이 세계에서 사는 지구인으로서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나 장점이 무엇이고 기여를 하고 싶은 도구가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함께 살기 위해서 서로 도와야 해요. 
그런데 때로 그것이 돈을 못 버는 일일 수도 있어요. 
한국 사회는 돈이 굉장히 중요한 사회가 되었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깊게 숨을 쉬고 좀 멀리 내다봤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학생들에게 ‘내공’을 쌓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고등과정을 밟아야 하는지,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기술을 터득해야 하고, 어떤 창업을 해야 하는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일을 따라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것이 내공을 쌓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유엔을 목표로 하거나 인권단체, 사회에 기여하는 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면 뚜렷한 가치관을 가져야 해요. 
유니세프 포스터를 보면서 ‘후진국 아이들, 난민들,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보다 먼저, 우리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닌, ‘존엄성 존중’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대로 일을 하려면 반드시 전문성을 갖춰야 해요.”

유엔난민기구에서 일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편하고 화려한 직업이 아니다. 
난민들을 보호하는 기구다 보니 난민이나 유목민과 함께 생활해야 할 때가 많다. 
그녀는 ‘글로벌한 유목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캠프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은 물론 10킬로미터 밖에서 로켓이 떨어지고 자동차가 폭파되기도 하는 위험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 유엔난민기구의 일이라고 한다.

“일시적으로, 가벼운 일들은 마음과 열정만 가지고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원인을 찾아서 그걸 해결해야 앞으로 똑같은 문제가 안 생길 테니, 반드시 전문성을 가져야해요. 
원인 분석, 문제 해결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말이죠. 
당연히 의사나 판검사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함을 물론이고 전략을 가지고 일해야해요. 
사실은 정말 큰 사업이거든요.”

제네바에서 하이힐에 정장을 차려입고 전 세계 정상들과 회의를 하는 것이 유엔기구라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해다. 
생활은 불규칙하고 질병에 걸린 난민들에게서 각종 전염병이 옮아 고생하기도 한다. 
정신적·육체적인 고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으면 더욱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은아 씨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힘들더라도 제가 움직임으로써 난민들이 혜택을 얻잖아요. 
그것을 보고 있으면 편하게 쉬면서 사치를 부릴 수가 없어요. 
이제는 글로벌하고 체계적으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제가 부지런히 활동을 하면 할수록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난민 수가 많아져요. 
반대로, 제가 쉬고 있는 동안 그 만큼의 인원이 혜택을 못 받게 되죠.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인생이잖아요. 
제가 조금 편하려고 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지니까, 힘들어도 조금만 더 움직이자고 항상 생각해요.”

심은아 씨는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활동하고 기여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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