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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떡을 안 만들면 누가 만들겠어요

병과점 ‘합’ 대표 - 신용일



청담동에 가면 미식가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떡집이 있다. 
떡집 ‘합’에서는 빵, 케이크, 과자, 커피에 익숙한 대한민국 도시인들에게 우리나라 전통 방식을 최대한 살려 만든 증편, 주악, 인절미, 약과를 판매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 제과학교 에콜 르노트르 졸업, 아테네 올림픽 한식 담당 셰프, 일본 한식당 ‘고시레’ 부주방장, 스위스 제네바 대사관저 요리사 등 글로벌하고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인 신용일 대표가 바로 떡집 ‘합’의 주인장이다. 
우리 음식인 떡을 배우러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던 사연에서부터 자격증 하나 없으면서 올림픽 셰프와 대사관저 요리사를 하게 된 이야기, 그리고 10년 동안의 긴 준비 끝에 드디어 떡집 사장님이 되기까지의 신용일 대표의 쫄깃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가고 싶었던 대학, 하지만……

“연세대학교에 너무 가고 싶었는데 마침 성적이 체육교육학과에 들어갈 정도는 되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스포츠 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6개월 동안 열심히 입시 체육을 해서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합격했죠. 
하지만 그때 너무 힘들게 운동을 해서 질려버렸어요. 
학교에 합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화를 다 버렸을 정도였죠.”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신용일 대표는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의상과를 부전공으로 선택하여 교수님들을 찾아다녔다. 
패션에 대한 흥미가 나날이 커지자 그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1학년 동기생들이 대학 생활의 자유를 만끽할 때 2, 3학년 선배들과 어울렸던 그는 좀 더 일찍 진로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체육교육학과 학생이 매일 마네킹을 들고 다니니 교수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여지없이 핀잔이 쏟아졌어요. 
그럴 때면 저는 스포츠웨어 디자이너가 되겠노라고 답변하곤 했습니다.”

TV 요리경연 프로그램에 출연

신용일 대표는 자신이 내뱉은 말처럼 졸업 후 스포츠 의류 관련 대기업에 입사하여 패션광고 홍보 일을 맡았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연예인과 촬영하러 돌아다니니 남들 눈에는 좋아 보였을 거예요. 
만약 제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저 역시 부러워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대기업의 시스템이 저에게는 맞지 않았어요.”

퇴사를 고민하던 그에게 뜬금없는 제의가 들어왔다.
TV 요리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MT를 가면 자진해서 친구들의 식사를 준비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는 과자를 구워 학교 친구들과 나눠 먹곤 했었는데, 그때 그 간식을 맛있게 먹었던 친구의 언니가 방송작가가 되어 요리경연 프로그램을 맡게 되자 그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었다.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여 방송 출연을 했는데, 뜻밖에도 제가 출연한 이후 저조했던 시청률이 갑자기 높아졌어요. 
그 일로 여러 방송사와 잡지사에서 출연 의뢰가 들어오는 등 아마추어 요리사로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죠.”

그때 방송국 PD, 푸드스타일리스트, 기자들은 그의 요리 감각을 인정했지만,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웹디자인회사를 창업했지만 그것도 6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성공하는 방법 중에 하나

“저는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도 현재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포기합니다. 
가슴에 담아둘 필요도 없어요.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싶어질 일도 많을 텐데 지금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큰 실패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실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경우가 많아요. 
‘지금은 여기까지 해야겠다’라는 시점을 아는 것,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성공하는 방법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유연하게 대처하고 현재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야 해요. 
물론 너무 하기 싫은 일만 아니라면요.”

신용일 대표는 당장 원하는 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했다.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다보면 자신의 능력에 맞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최고가 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최고가 되겠지만 자신이 가진 능력이 그 정도가 아니라면 최선을 다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고라는 것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거잖아요. 
‘그냥 즐겁게 내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만족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설거지부터 신상품 개발까지

큰 꿈을 갖고 창업한 웹디자인회사가 문을 닫았지만 신용일 대표는 좌절하기보다는 좋은 경험을 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100만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150이나 200만큼 평가해주는 일, 사람들한테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일, 그것은 바로 요리였다.

그 때 그는 20대 후반이었지만 그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도 참고 기다려주시는 분들이라 그가 빨리 자리 잡기를 채근하지 않으셨다.

“의상학을 부전공할 때처럼 찾아다니며 상담할 교수님도 없었고, 요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한동안 고민하며 배울 곳을 찾다가 ‘궁중음식연구원’이라는 요리학원에 등록을 했어요. 
어느 정도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지만, 요리에 대해 아는 건 없어도 타고난 손재주가 있었던 저는 어렵지 않게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죠.”

하지만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나머지 5일 동안 그는 할 일을 찾아야 했다. 
일자리를 찾아 압구정동 거리를 걷던 그는 우연히 어느 떡집 앞을 지나다가 너무 예쁜 떡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약과라도 사 먹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떡집에 들어갔던 그는 가게에 계신 선생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화자’라는 그 떡집은 자신이 다니던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운영하는 가게였던 것이다. 
마침 일손이 모자라던 참에 그가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하니 모두 반신반의한 얼굴로 내일 새벽에 한번 나와 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설거지만 했어요. 
금방 나갈 애한테 가르쳐서 뭐하느냐는 거였지요. 
저를 두고 ‘일주일 일한다, 길어야 한 달이다’라는 말들이 오갔나 봐요. 
하지만 열심히 일했어요.
어느 날 과장님이 불러서 언제까지 다닐 거냐고 묻더라고요. 
계속 열심히 할 거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떡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삼 주 만에 거기 있는 떡을 다 가르쳐 주셨어요.”

떡, 한국 사람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렇게 아르바이트로 입사해서 떡 만들기 6개월 만에 신용일 대표는 대리로 승진했다. 
떡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는 혼자서 신상품도 개발했다.

“기억력이 안 좋은 것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아요.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데는 좋은 면도 있어요. 
레시피를 제대로 못 외우니 감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실수할 때마다 ‘다음에는 이렇게 하자’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보니까 신상품을 계속 개발하는 거예요. 
사실은 제가 대단한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떡을 개발하는 사람이 그만큼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현재 떡을 만드는 분들은 떡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에요. 
그러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모험하기는 쉽지 않죠.”

현실적으로 현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신상품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일을 하며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리나라 대학에 한식조리과나 호텔조리과, 제과제빵과는 있어도 떡과는 없는 게 현실이고, 한식조리과에서도 떡 수업은 6시간 정도밖에 안 되니 연구는커녕 관심을 갖는 젊은이도 적을 수밖에 없다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빵은 한국 사람이 하지 않아도 전 세계에서 매일매일 좋은 레시피와 노하우, 새로운 재료와 도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떡은 한국 사람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일단 직접 부딪치며 길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신용일 대표는 요리에 대해 더 배우고 싶었다. 
요리를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으니 기본이 없고 그러니 곧 밑천이 드러날 판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아이디어를 접목해 보고 싶었지만 떡을 배울 만한 곳이 마땅찮았다. 
빵 가르쳐주는 학원은 많아도 떡 가르쳐주는 학원은 거의 없었고, 두세 군데 있는 곳조차도 옛날부터 만들어오던 떡을 가르치는 정도였다.

“떡을 한국의 디저트라고 한다면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저트는 프랑스가 최고니까요.
불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 유학을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배운다고 해도 어차피 그들 또한 프랑스에서 배우고 온 사람들일테니 그럴 바엔 직접 프랑스에 가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손으로 하는 것이니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따라하는 건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는 미국에 있을 때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아 ‘나는 어학 쪽에 소질이 없나 보다’라고 실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영어를 줄줄 쏟아내는 것을 보고 ‘아무렴, 내가 저 꼬마보다 못하는 것은 좀 창피한 일이지’라는 생각에 오기를 가지고 공부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도 그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프랑스 거지들을 보고 있다가 ‘하물며 거지들도 불어를 쓰는데 내가 뭐가 부족해서 불어를 못하지’ 하는 생각에 언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공부를 했다. 
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 것, 사소한 것을 자극 삼아 분발하려는 성격은 재능보다 요긴했다. 
외국인 앞에서 의기소침하지 않았던 그의 성격은 프랑스에서 큰 힘이 되었다.

“한국에서 좋은 학교를 찾기보다는 현지에 가서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아서 어학연수 비자를 받은 다음 무작정 프랑스로 갔어요. 
발바닥이 아프도록 파리의 제과점들을 돌아다니며 거기에서 일하는 셰프들에게 물어보았죠. 
제과 제빵을 공부하러 파리에 왔는데 학교를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많은 셰프들이 ‘르노트르’를 추천해주더라고요.”

프랑스는 물론 유럽까지, 제과 제빵사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르노트르’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다. 
‘르노트르’에 입학한 그는 수업을 들으며 선생님들을 돕는 ‘조교’ 일을 했다. 
조교라는 직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님들이 학교 측에 그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을 해서 수업 시간마다 들어가 선생님들을 도우며 6개월짜리 수업을 1년씩 들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다시 스위스로

신용일 대표가 알찬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려던 2004년, 유럽에서 가장 큰 케이터링(출장 서비스) 회사를 가지고 있던 ‘르노트르’가 그 해 아테네올림픽 전체의 케이터링을 맡게 되었다. 
게다가 아테네올림픽의 가장 큰 스폰서가 우리나라의 삼성이었다. 
스폰서인 삼성에서 케이터링에 한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했는데, 콧대 높은 프랑스 회사에 한국 조리사가 있을 리 없으니 난리가 났다.
평소 그를 좋게 평가하던 교장선생님이 그 소식을 들었고, 학교의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그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추천하여 그는 올림픽에서 한식요리를 맡게 되었다.

“250인분의 밥을 하루 세 끼, 한 달 동안 혼자서 다 해내고 올림픽이 끝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있었어요. 
좋은 경험이었지만 너무 힘들었기에 우울증이 찾아왔죠.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무언가 시작했어야 하는 시점이었는데 우울증으로 무기력한 상태였어요. 
그때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지인으로부터 새로운 스튜디오를 시작하니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고 그 덕분에 다시 몸을 추스르고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배우 배용준이 일본에 낸 한식당 ‘고시레’의 부주방장으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결혼할 사람도 만났다. 
그가 일본에서 1년 넘게 일하던 어느 날 외무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한국대사관저에서 요리사를 뽑으니 오라는 제안이었다. 
남자요리사가 해외공관에 파견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가짐이 흐트러졌을 때 만화책을 보는 습관이 있어요.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용감하게 도전하고 불의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승리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반성도 하고 자극도 받거든요. 
외무부의 제안을 받았을 때 언젠가 일본 만화책에서 본 대사관저 요리사가 떠올랐어요. 
사가 다른 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요리사가 멋진 요리를 해서 내놓았고, 그 요리를 맛본 다른 나라의 대사는 음식 맛에 감동하여 결국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문제가 잘 해결된다는 극적인 내용이었어요. 
그런 ‘음식 외교’를 꼭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요.”

그렇게 그는 스위스에서 1년 반 동안 일하다가. 결혼을 위해 귀국했다.

10년 동안 그려왔던 그림 ‘합’

신용일 대표가 한국으로 돌아와 남산의 한식당 ‘품서울’에서 열심히 일을 한 것도, 1년 만에 ‘품서울’을 나와 드디어 자신의 가게 ‘합’을 오픈한 것도 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아내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사는 아내와 빨리 합치고 싶은 마음에 ‘합’이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그가 ‘품서울’을 떠나 자신의 사업을 준비할 때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레스토랑, 카페, 떡집, 빵집, 케이크집 등 할 수 있는 것은 많았지만 어느 것을 해야 할지 그는 쉼게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 맛있게 만들 자신이 있었던 떡볶이집을 할까도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 아내가 ‘처음에 하려고 했던 것을 하는 게 맞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가 결정을 하고 나자 운이 좋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오픈을 준비하면서 ‘윈도 베이커리(동네 빵집) 전시회’를 기획했는데, 그때 행사에 참여했던 건물주가 그에게 직접 연락을 해왔다. 
인사동에 건물을 새로 짓는데 1층에 떡집을 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해서 10년을 준비했던 떡집 창업이 현실이 되었다.

“제가 한 달 만에 떡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10년 전부터, 프랑스로 유학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점포 입주 제안을 받았을 때 그다지 망설이거나 고민하지 않았죠.”

10년 동안 품어왔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 일사천리였지만, 그에게 있어 어느 날 갑자기 쉽게 이루어진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대학생 때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으냐고 물으시기에 팥빙수 기계를 사달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손으로 돌리는 파란색 팥빙수 기계, 아시죠? 
그때 어머니가 사 주신 기계를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맛있는 팥빙수를 만들고 싶었어요. 
카페를 시작하면서 만들고 싶었던 팥빙수를 만들어 팔았더니 그해 ‘대한민국 3대 팥빙수’에 선정되더라고요.”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

신용일 대표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가슴속에 ‘내가 이것만은 반드시 하겠다’는 생각을 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디에서 공부하고 무슨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지 보다는 진짜 알맹이, 진정성과 깊이가 중요한 것이다.

“떡을 하고 싶다고 해서 꼭 떡을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프랑스 요리를 공부해도 되고 일식을 공부해도 됩니다.
결국에는 다 필요하니까요.
그 지식과 경험이 나중에 자기가 하는 일에 녹아들어가게 돼 있어요. 
재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열심히 하세요. 
그렇게 해서 얻은 다른 방면의 지식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마음이 간절하다면 비록 조금이르거나 늦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꼭 하게 된다고, 항상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신용일 대표는 한식에 관심이 있고 한식을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글로벌 인재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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